칼럼사설
[정준길의 공화주의(4)]위대한 자영농의 나라를 만들다.
왜 우리 지폐엔 조선시대 얼굴만 있나?
기사입력 2015.10.14 16:12 | 최종수정 2015.10.14 16:12

새누리당

 새누리당 광진구(을) 당협위원장 정준길 변호사

위대한 자영농의 나라를 만들다 


역사 이야기를 좀 더 해보겠습니다. 한국현대사에 있었던 사건 중 가장 왜곡된 평가를 받고 있는 대표적인 것을 들라면 저는 ‘농지개혁에 대한 평가’를 들고 싶습니다.


좌파적 관점의 역사관은 북한의 농지개혁은 무상몰수-무상분배의 철저한 농지개혁이었던 반면, 대한민국은 유상몰수-유상분배라는 불철저한 개혁을 하였다고 평가합니다.


아시다시피 사회주의를 채택한 북한이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했던 것과 달리 자본주의를 택한 대한민국은 토지개혁을 유상몰수 유상분배의 원칙에서 따라 시행하였습니다.


당시 남쪽에도 북한처럼 무상몰수 무상분배로 토지개혁을 하자는 주장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끝까지 유상수용의 원칙을 고수했습니다. 무상몰수 무상분배 방식으로 추진될 경우 궁극적으로는 농민들이 대지주의 노예에서 정부의 노예로 바뀔 뿐이라는 것도 큰 이유였고, 무엇보다도 자본주의과 재산권 보호를 핵심으로 하는 자유민주주의 체제 하에서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방법이기도 했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것은 매우 뛰어난 통찰이었습니다. 북한의 토지개혁은 지주들로부터 토지를 강탈한 것이었고, 박해를 견디다 못한 많은 지주들이 월남했습니다.


농민들도 처음에는 공짜로 자기 땅이 생겼다고 좋아했지만, 결국 북한 당국은 협동농장을 구실로 농민들로부터 땅을 도로 빼앗고 말았습니다.


그러다보니 근로의욕이 사라진 북한 농업에는 발전이 있을 수 없었고 급기야 만성적인 식량결핍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북한은 비로소 공동생산의 한계를 깨닫고 그 해결방안을 찾고 있으나, 김정은 체제의 생존 문제와 북한 인민들의 생존문제가 상호 모순관계에 놓여있어 진퇴양난의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이러한 문제점을 이미 간파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이런 통찰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일찌감치 공산주의의 문제점을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공산주의 바람이 거세던 1920년대에 벌써 공산주의의 부당성을 논증하는 글을 썼던 사람이었습니다.


남쪽의 농지개혁은 이승만의 의지에 따라 유상 수용형태로 진행되었습니다. 일단 개인이 소유할 수 있는 농지 상한선을 정한 다음 그보다 더 많이 소유한 지주의 땅은 국가에서 지가증권이란 것을 발행해 매입하는 방식을 취했습니다.


토지를 받는 농민에 대해서도 유상분배의 원칙이 적용되었습니다. 농민은 자기가 받은 토지에서 나는 생산량의 150%에 해당하는 금액 또는 현물(사실관계 확인 필요)을 바치면 땅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이는 생산물의 절반을 3년만 바치면 그 땅이 자기 땅이 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땅을 나누어 주되 무조건 ‘공짜로’주지 않고 시간과 노력을 투입하도록 하는 제도적 과정을 설계한 것입니다.


물론 이 정도 수준의 토지개혁조차 쉽지는 않았습니다. 특히 지주계층이 토지개혁을 집요하게 반대했습니다. 그러자 이승만 대통령은 특단의 조치를 취합니다. 그것은 한 때 공산주의자였다가 전향한 조봉암을 농림부장관으로 기용한 것입니다.


결국 이승만 대통령은 조봉암을 통해 농지개혁법을 밀어붙였고 1950년 3월 농민들이 ‘분배농지예정통지서’를 받게 됐습니다. 이 통지서는 얼마 후면 당신의 땅이 생긴다는 증명이었습니다.


우리 역사에서 제대로 조명 받지 못하고 있지만,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역사의 한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2차 세계대전 후 독립하면서 사회주의를 채택하지 않은 신생국가들 중 유상몰수 유상분배의 농지개혁이 실제로 이루어진 나라는 대한민국이 거의 유일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동남아시아나 남미 국가들의 경우 건국 이후 기존의 지주세력들의 반대로 토지개혁이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고, 그 결과 지주세력의 영향력 하에서 산업화가 진행될 수밖에 없었으므로, 그러한 방식의 산업화 진행과정에서 지주세력이 산업자본가로 변신하면서 국가의 부가 더더욱 소수자에게 몰리는 악순환이 반복되었습니다.


농지개혁 과정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개인적으로 땅 한 평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토지문제에 전혀 이해관계가 없었습니다. 반면 이승만 대통령의 정적이었던 한민당은 호남의 지주 출신들이 주도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농지개혁은 한민당의 물질적인 기반을 무너뜨리는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한마디로 농지개혁은 혁신과 개혁을 지향하는 대한민국 보수의 원형을 보여준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역사의 아이러니라고나 할까요? 토지개혁은 6.25 전쟁의 향방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조봉암 농림장관이 주도한 농지개혁은 전쟁 3개월 전인 1950년 3월에 마무리됐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조치로 대한민국 농민들은 한국전쟁에서 북한이 아닌 이승만 정권을 지지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목숨 걸고 지켜야 할 내 땅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박헌영은 북한의 인민군이 치고 내려오면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남한의 수많은 세력들이 호응할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그 주장이 잘못된 이유는 바로 농지개혁 덕분에 난생처음 내 땅을 가진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바쳐 싸우게 된 상황의 변화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도 종종 만약 이승만 대통령이 한국전쟁 전에 농지개혁을 하지 않았다면 대한민국이 어떻게 되어있을까? 라는 질문을 해봅니다. 그 때마다 이승만 대통령의 탁월한 판단력에 절로 머리가 숙여집니다.


그리고, 한국전쟁 이후 엄청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는 바람에 농민들이 지불해야 할 토지대금이 사실상 무상이나 다름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듯 예상 못한 긍정적인 효과로 인해 향후 다수의 자영농 세력이 중산층으로 변신해 한국사회에 자리를 잡는 행운까지 겹쳐졌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이와 같은 농지개혁은 전통적 지주세력의 몰락과 자영농의 등장을 가져왔습니다. 1945년 당시 전체 경작면적의 약 35%에 불과했던 자영농지의 비율은 약 93%로 늘어났습니다. 해방 전에는 전체 농가의 75%가 소작농이었지만 1950년대엔 전 경지의 92.4%가 자작농으로 바뀌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천 년 넘게 내려온 양반과 상놈, 지주와 소작농의 봉건적 신분제도의 기반이 확실하게 무너졌습니다. 농민이었던 대다수 국민이 저마다 자신의 물질적 기반을 갖게 되면서 실제로 국가의 주인노릇을 할 수 있는 민주주의의 토대도 마련되었습니다.


결국 우리 역사상 최초로 열린 평등 시대를 가능하게 한 것은 대한민국의 출범, 그리고 농지개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현재 이승만 대통령의 공과에 대한 많은 논란이 있고 비판을 받아야 할 부분도 적지 않지만 최소한 그가 대한민국 건국과 토지개혁을 통해 대한민국의 기초를 만든 것은 인정받아야 합니다.


이승만은 세계정세 및 동북아 정세를 올바르게 파악하고 미국의 대(對)한반도 정책 변화를 궁극적으로 이끌어 낸 대한민국 건국의 주도자였습니다.


중국 국민당이 내전에서 공산당에게 패색이 짙어진 1947년 4월, 미국은 종래의 관망 정책을 폐기하면서 한국이 전략적 가치가 없다는 판단을 내립니다. 이어서 9월에는 소련의 동시철병 제의를 받아들여 미군 철수와 함께 한국문제의 유엔 이관을 결정합니다. 이런 결정 과정에서 당시 미국 수뇌부는 남한이 공산화되어도 할 수 없다는 입장을 가졌습니다.


이에 대응해 이승만 대통령은 1946년 6월 정읍발언, 12월 미국 방문 등을 통해 유엔에 의한 한국문제 해결을 촉구하며 단독정부 수립 전략을 제시합니다. 이러한 신속한 결단과 추진력을 통해 미국이 유엔을 통한 남한 단정 수립을 결정(1947년 9월)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좌파진영 입장에서는 이승만 대통령 때문에 자신들이 원하는대로 한반도 정세가 흘러가지 않은 것이므로, 오히려 이승만 대통령을 남한 단독 정부를 세워 민족분단을 초래한 책임이 있다고 낙인을 찍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합니다. 이에 더하여 그들은 자유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한 이승만 대통령의 공헌과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6년제 의무교육제 시행 등과 같은 업적도 의도적으로 외면하거나 깎아내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왜곡된 시각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반면, 북한은 민족 통일을 위해 한국전쟁을 일으켰고, 제대로 된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농지개혁을 하였으므로 비록 최근에 삼대세습, 빈곤으로 인한 아사자 속출 등과 같이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수많은 문제점이 북한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옹호하게 됩니다. 북한에 대한 긍정적이고 온정적인 관점을 생산하는 토대를 제공합니다.


왜 우리 지폐엔 조선시대 얼굴만 있나? 


그러고보니 대한민국에는 참으로 이상한 일이 하나 있습니다. 많은 나라들이 근대화 국면에서 국민국가의 건국에 공이 큰 인물이나 지도자들을 지폐에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지폐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조선조의 인물들 뿐입니다.


화폐는 국가의 얼굴인데, 주권재민의 공화정을 국체로 하는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인물로 조선시대의 전제군주, 양반지배질서의 사상적 기반을 닦은 유학자, 구시대적인 “현모양처”의 아이콘을 대한민국의 상징인 지폐에 새기는 것은 어딘가 모르게 어색한 느낌을 줍니다.


우리가 대한민국을 건국한 공로자들을 지폐에 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단적으로 말해 현대사에 대한 역사인식의 차이와 갈등 때문입니다.


3.15 부정선거, 4.19. 5.16과 87년 6월 항쟁 같은 굵직굵직한 현대사의 격변기를 거쳐 오는 과정에서 잘못된 역사관으로 인해 이승만의 건국, 박정희의 산업화 공로를 무시하고 독재자라는 낙인찍기에 집중하는 세력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민주화 투쟁은 끝났습니다. 역사논쟁도 끝낼 때가 되었습니다. 협소한 역사적 관점에서 벗어나 건국의 공로자들에 대한 보다 입체적인 평가를 내리고, 그들을 대한민국 화폐의 모델로 삼을 때가 되었습니다.

 

정준길 변호사(새누리당 서울시 광진을 당협위원장)


세종초등학교, 건대부중ㆍ고 졸업

서울대 입학ㆍ법과대학 졸업

KAIST MBA 졸업

사법시험(35회) 졸업ㆍ사법연수원 졸업(25기)

부산지검 검사, 수원지검 여주지청 검사, 울산지검 검사, 서울중앙지검 소년부, 특수3부 검사

상해 복단대 방문학자 및 화동접법학원 수학

대검찰청 중앙수사부(공적자금비리 수사처 포함)파견

새누리당 광진구(을) 국회의원 후보

CJ(주) 경영전략지원 담당

CJ 제일제당 경영지원실 상무(전략구매실장)




지아이뉴스 시스템기자 (stop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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